1. 몰이해의 구원
다시 상실감에 좌절할 때 우는 마음으로 책을 집어 든다.
너마저 믿음을 우습게 만들 때, 밀란 쿤데라의 책을. (난 정말 너를 모르겠어. 덕분에 요즘 마음이 지옥같아졌어. 고마워.)
신입인데 벌써 잘 모를 때, 김하나의 책을. (신입인데 생각은 부장같이 썩어있어.)
적어도 요즘 나에게 세상만사 몰이해를 구원해줄 수 있는 절대적 존재는 책이 되어버렸다.
혹자는, 아니 정말 가깝게는 우리 엄마만 하더라도 복음서나 신을 찾으라고 부탁하겠지만,
그냥, 여전히 정말 그러고 싶지 않다.
신과 교리서 이전에 내가 있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단지 엉엉 우는 마음으로 필사적으로 책을 집고, 읽고, 옆에 놓인 노트에 질문들을 성실히 써내려갈 뿐이다.
그런 날들이 계속 반복해서 이어지고 있다.
2. 그래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으면서
하고있는 몇 가지 질문들.
-나는 여자니까, 자연스레 여자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할수밖에 없다.
궁금한 것은, 그토록 모성애란 강인한 정신을 가지고 있는 생물체들이
왜 매번 자신 앞에 놓여져 있는 존재의 무게는 감당하지 못한 채
번번이 나자빠지냐는 것이었다.
자신의 존재증명이 출산과 후세보존일수밖에 없었던 과거의 전적들 때문인가?
그렇다면 그 유산은 여전히 나에게 구태여 받기 싫은 끔찍한 선물보따리다.
새끼를 위해 살아간다는 이 세상 어미들의 말은 아직도 나에겐 이해가 안가는 말이다.
어미 이전에 그들은 한 명의 인간이지 않은가? 충분히 누구에 빗대어 서지 않아도 될 정도의 가치를 가진.
-정말 '우연'만이 '진실'을 밝힐 수 있나?
(똑같은 이치는 아니지만, 전에 라쇼몽과 하이데거에 관해 썼던 이야기 중에서도 자판기비유가 생각난다.
탈은폐로 가는 길은 의도가 오히려 우연에 가까운 계기들로 시작될거라는 이야기였다.
아주 가볍게 어떤 걸 마실지를 골라 생각없이 누르는 어느 손길처럼)
아직 다 읽지는 못했다.
3. 정말 4개월 차의 이야기
- 우리 팀이 (CD님이) 좋다고 생각하는 바는 정말 좋은 카피의 바리가 아니라, THEME의 바리라는 것을 어느 순간부터 알았다.
적당히 어느정도 기괴하고, 적당히~ 어느정도 트렌디한 것들 (정말 너무 기괴하거나 너무 트렌디하면 안된다.) 사이에서
줄다리기 하는 theme의 바리.
그게 아쉽다.
사람에 대한 인사이트가 충분히 있고, 맘을 울리는 카피라면
그게 굳이 기괴하거나 트렌디하지 않아도,
인정해줄 수 있는 팀의 분위기는 어떨지 슬슬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 월급 2-3일 전에 회사의 컴퓨터 창은 전부 쇼핑몰 창으로 가득하다.
정말 도망치려고 애썼던 그런 세계에 발목이 묶인 기분이다.
트렌디한것들, 예술적인 것들, 아름다운 것들을 찬양하지 말자는 것이 아니다.
그냥 입에 올려야 될 만한 것들은 자주 입에 올려주고, 서로 이야기해주었으면.
자세하게는 오늘의 세계, 너와 나의 관계, 잃고있는 권리, 뭐 이런 것들.
- 회사 홈페이지에 올려진 신문 기사들을 읽다가,
최진기가 무슨 조선사 최대의 업적이라고 하는 그림을 강연에서 소개했다가
사실은 그게 아니고, 어느 여대 교수가 최근에 그린 그림이라는 게 판정나 모든 활동을 접었다는 기사를 봤다.
기사의 끝에는 요즘같이 지식이 속성으로 필요한 시대에, 악세사리 같이 하나쯤 달 수 있는 게
인문학이라는 이야기가 걸려있었다.
여전히 그리워하는 우리 교수님이 생각이 났다.
대학교는, 특히 인문대의 수업들은
학생이 낚시를 할때 고기를 직접 잡아주는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고기를 잡는 법을 가르쳐주는 곳도 아니라고 하셨다.
단지 왜 낚시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져주는 곳인 것 같다며
이런 비유는 어디에서 발췌한 게 아니고,
자신이 생각한거라고 멋쩍게 웃으셨다. 멋있지 않냐며.
그런 교수님 밑에서 문학을 배울 수 있었던 건 정말 행운이었던 것 같다-라는 생각을
하얀 쇼핑몰 결제창이 가득한 모니터 숲에서
나는 했다_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