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시 공부는 결핍을 확인하는 것의 연속이다.
나름 영문학과 이중전공이라 고전에 포커스를 두고 많이 읽어왔다고 생각했음에도 불구,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까뮈의 <이방인>,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카프카 <소송>, 조지 오웰 <동물농장> 포함 수많디 수많은 기본 고전을 안 읽은 나 놈의 상태를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진짜 한숨만 나온다. 고전문학지식 결핍.
서울대 애들이랑 얘기해보면 항상 한국사 이야기에서 답답하게 막힌다. 나 멀쩡히 사지육신 가진 한국 사람인데 한국사 지식 결핍.
그렇다고 해서 내가 뭐 스페인 및 이베리아 반도의 역사 및 유럽사의 특징을 잘 설명할 수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기억력 결핍.
옛날과 같이 드립의 역사를 꿰고 있다거나 뭔가에 깊이 덕질(옛날 고딩 때 나는 진짜 필카를 더럽게, 정말 더럽게 팠었다. 그걸로 나홀로 출사도 많이 다니고.)하는 것도 아니다. 덕력 결핍.
토론 하면 누군가에게 빨려들기만 하지 내 중심으로 서 있질 잘 못한다. 말도 더듬대기 일쑤고 중간에 막 웃고. 말빨 결핍.
나이가 들면 들수록 고집스럽게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의 페이지만 넘겨 살핀다. 미국 뷰티 구루, 새로 나온 립제품, 다른 색깔의 아이섀도우나 방 꾸미기할 수 있는 소소한 이케아 인테리어 소품 같은 것들.. 내가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을 하면 너무 한심하다는 걸 만천하에 공표하는 꼴일테니 sns에 관심이 없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 일인가. 근데 또 내가 남성사대주의같은 게 남자애들이 프라모델을 조립하고 노는 것, 차 좋아하는 것들도 굉장히 그 성별에 있어서는 전형적인 건데, 그건 나름 독특하고 reasonable한 취미라고 느껴진다. 아무튼 이게 여자애들이 흔히 가지고 있는 고질적인 문제, 좁은 분야의 관심성 같은거 같은 느낌적인 느낌인데 어쨌거나 개방성 결핍.
점점 심각하게 느껴지고 있는 문제인데 어떠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눌 때 그 방향을 바꿔놓을 정도로 핵심적이거나 획기적인 그 무언가!!!!!!를 찔러 툭 던져놓는 애들이 있다. 그건 비단 스터디뿐만 아니라 학교에서도 느껴왔던 거다. 나는 그럴 능력이 부족하다. 그런 순발력이 가미된 핵심찌르기보다는 난 무언가를 놓고 봤을 때 그냥 다른 방식으로 묘사하는 걸 남들보다 잘하는데, 이 묘사가 획기적이기보다는 그냥 그 무언가의 본질을 날카롭게 꿰뚫지 못한 채 빙빙 도는 어떤 꾸밈적 행위라고 해두자. 사과라고 예시를 들면 나는 과도를 들고 사과의 껍질만 내내 돌려깎고 있어 맛을 보지 못하고, 누군가는 날카로운 포크를 던져 그 사과를 한 큐에 뚫어버린 다음 맛잇게 냠냠 먹는 느낌? 그런거에 비하면 나의 이 능력은 되게 부질없는 것 같아 저주스럽기까지 하다. 이건 내가 생각하기에 아이큐 결핍.
그렇다면 내가 감성이 남들보다 엄청 뛰어나다고 할 수 있나? 옛날에는 그랬던 것 같다. 누가 보는 거 상관 안하고 매일매일 노트에 copy writing 형태로 뭔가를 적어 내려갔다. 그런데 이제는 내 온 바디와 브레인이 ‘이성’을 격하게 갈망하고 있기 때문에 감성마저 멀어져갔고, 그에 반면 이성은 내게 다가와 주지 않았다. 이성과 감성 결핍.
스터디 하면서 정말 도움 안되고 아몰랑으로 일관하는 여 스터디원이 있다. 같은 여자로서 분명 조언 몇 마디 더 해주고 언니로서 더 따뜻하게 챙겨줄 수 있을텐데 걔만 보면 (친하지도 않지만) ‘제발 정신 좀 차리고 다녀라. 그러니까 여자들이 싸잡아 욕먹는거.’하고 쏴주고 싶은 나는 인간성 결핍.
그리고 이 모든 것에서 느껴지는 총체적인 결핍의 결핍. 이런 결핍 속에서 오늘도 난 여전히 숨이 막히고, 괴로워 죽을 것 같다. 나는 왜 대충 어느 회사 어느 인사팀에 취직해서 어느 오빠에게 아몰랑 오빠가 해줘! 하고 살아가는 길을 선택하지 않고, 되지도 않는 내 능력을 따라 난 길에서 이런 온갖 종류의 결핍들에 괴로워 하고 있는 것인가. 정말 나는 구제불능이다. 나 너무 무식해, 나 너무 한심해, 나 너무 뭔가 많이 결핍돼 있어 하고 분해서 눈물이 주르륵 흐를 지경이다. 이런 글이라도 쓰는 게, 나를 살리는 길이다. writing cure의 힘을 믿기 때문에.
+ 이건 오늘도 하이데거에 패배하고 온 자괴덩어리가 하는 말이 아니다.